이 모든 건 어느 화요일에
시작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 옵니다.
통화 거절을 눌렀죠.
또 전화가 옵니다.
또 거절을 눌렀어요.
하지만 엄마는 계속 전화하셨고
결국 전화를 받아, "일하는 중인데
다시 전화 드리면 안 돼요?"
"안돼, 지금 중요한 얘기가 있단다."
"근데 저 지금 바쁘다고요."
"너 주말에 뉴욕에 다녀와야겠구나."
"네?"
"너 주말에 뉴욕에 가야 한다고."
"너한테 맞선 자리가 들어왔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이란다."
"엄마, 뉴욕까지 그냥 그렇게
모르는 여자를 만나러는 안 가요.
사랑은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게 아니라고요.
저 중매 결혼 시킬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메일 확인해 보고,
비행기표를 산 후에 연락하거라."
(웃음)
저희 어머니는 아주 단호하신 분입니다.
제가 30살 때, 결혼 적령기라 하셨고
32살 땐, 이미 2년이나
늦었다고 하셨죠.
인도의 '하이데라바드'라는
왕족 도시 출신인 어머니는
중매 결혼의 관습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어머니는 옳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고
사랑은 그 이후에 생긴다고 믿으시죠.
하지만 저는 미국인이고
사업가이며
밀레니얼 세대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메일을 확인했어요.
(웃음)
그렇게 이메일이 왔나 확인하고
열어본 후...
늘 하던대로
비행기 표를 사고
그 주 주말에 뉴욕으로
향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비행기 안에서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기억해 오마르, 신사답게 행동하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야 해.
의자를 꺼내주고, 계산하고,
모든 걸 다하고, 진실하고, 재미있게.
평소대로만 하자."
식당에서 그분을 만났고
다짐한 대로 다 했습니다.
좋은 시간을 보낸듯싶었죠.
마지막에 그 분을 데려다주고
문자를 보냈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뉴욕에 하루 더 머물 건데
내일 커피 한잔하실래요?"
보내기를 눌렀죠.
일요일 아침이 되서야
드디어 답장이 왔고
너무 기뻐서 혼자 밖으로 나갔어요.
호숫가가 있었고
그곳에서 혼자 읽고 싶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마르.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친구로 지내요."
(웃음)
충격이었습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저한테 맞선을 보게 하시다니.
제가 말씀드렸죠.
중매는 저랑 안 맞아요.
사랑은 이렇게
이루어 지는 게 아니라고요.
더는 맞선 볼일은 없을 거예요.
우린 인연이 아니래요.
그냥 아니래요."
딸깍.
전 마이애미로 돌아와서 일에 전념했고
몇 달 동안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았어요.
쳇바퀴 도는 햄스터 같았죠.
매일같이 조깅하고
주 중에는 재정 구조 분석가로 일하며
토요일에는 플로리다 국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듣고
일요일에는 체스 교실을 운영합니다.
학생들에게 현명한 전략 법을 가르치죠.
그래서 저는 사랑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다시 전화하셨습니다.
"아들아, 결혼은 인생에서 필수란다."
(웃음)
"엄마!"
"아내가 있는 삶을 생각해 보렴.
네 자손을 생각해 봐.
네 엄마와 할머니의
행복을 생각해 봐라."
(웃음)
저희 어머니는 현명하신 분입니다.
할머니를 언급하면
제가 말을 들을 걸 아시는 거죠.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저의 어린 시절 가정교육은
다른 미국 아이들과 달랐어요.
발달에 중요한 인생의 최초 5년을
할머니 손에 자란 저에게
할머니는 저의 어머니였고
아버지였으며 제 모든 것이었죠.
할머니는 우리의 민족어인
우르두 어를 저에게 가르치셨어요.
우리의 종교와 풍습을 존중하고
인류애를 가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께서
제가 결혼하기를 원하셨고
심지어 증조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농담까지 하셨어요.
몇 달간의 거절과 숙고의 시간 후,
결국 다시 맞선을 보기로 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원하던 바였죠.
저희 어머니는 집요한 분이세요.
이번엔 어떤 일을 꾸미셨을까요?
중매쟁이를 모셔오셨어요.
친척 중 한 분이셨죠.
취미로 중매를 하시는
분을 찾으신 겁니다.
(웃음)
재밌고 걱정근심 없고
쾌활하신 파티마 이모님은
저에게
"중매는 하늘에서 하시는 거지.
난 맞는 짝을 데려올 뿐이야."
(웃음)
(박수)
절 설득하기에 충분했죠.
(웃음)
이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의 신상을 작성하는 것이죠.
결혼을 위한 신상정보입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실 텐데,
취업 이력서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결혼 이력서라고 부를 수 있죠.
(웃음)
나이를 적고, 학력,
경력, 가정 환경,
야망과 포부, 바라는 여성 상,
그리고 사진도 포함해야 해요.
간단하죠?
중매 이모가 형식을 주시고
"이대로 해"라고 하셨어요.
항목으로 정리돼 있었죠.
하지만 저는, "이건 아니야.
난 창의적으로 쓰겠어.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을 쓰겠어."
그래서 전 그 항목들을 잘 살펴본 뒤,
재밌고 제 성격이
빛을 발하게끔 만들었죠.
일주일 후에
중매해 주시는
파티마 이모님께 보냈습니다.
제 결혼 이력서는 대 인기였습니다.
중매 이모는 전국 곳곳의
여성들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심지어 영국과 캐나다에서도
선 자리가 들어왔죠.
(웃음)
중매 이모는 마치 매니저처럼
저한테 전화해서는
"이 여자는 어때?'
"몰라요.
마이애미로 이사 온대요?"
"아니."
"그럼 됐어요."
(웃음)
그렇게 하기를 몇 달,
저는 계속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운명의 상대도 못 만났고
중매 결혼은 아무래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신을 믿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딘가에
내 진짜 사랑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2015년 6월 21일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였고
라마단 셋째 날 이였어요.
바로 작년이었죠.
어머니께서 전화해서 말씀하셨죠.
"우리에게 완벽한
선 자리가 들어왔다."
또다시 "우리"라 하셨죠.
(웃음)
얼른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아리바'였고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맨 처음처럼 긴장하며
전화를 했습니다.
우린 너무 잘 통했죠.
"좋았어!"
우리는 30일 동안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어요.
그렇게 계속 연락을 했고...
모든 게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30일 후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 전에, 아리바가
소아신경과 의사라는 것과
저만큼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리바가 좋아했던 점은
제가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주말에는 어린이 체스 교실을
운영한다는 것이었죠.
드디어...
만날 날이 정해졌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어요.
만나러 가는 날까지만 해도요.
비행기 탈 때부터 말씀드릴게요.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서 있는데, 1분이
늦어서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래!
일단 시카고에 가야 해."
두 번째 비행기를 찾기 시작했고
항공사 하나를 찾았습니다.
줄을 서고 기다려서
제 차례가 되었어요.
계산 할 때가 되자,
직원분이 말하길
"1,175달러입니다."
(웃음)
"어쩌지,
그래, 충분히 이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야.
그래, 계산하자.
시카고에 가야 하니까."
면허증과 신용 카드를 꺼내
계산하려는데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떠올랐어요.
짐을 다 챙겨서 뛰기 시작했죠.
(웃음)
3번 터미널로 뛰었고
(숨을 몰아쉰다)
도착했는데 줄이 있길래
또 줄 서서 기다렸고
계산할 때가 되었어요.
"시카고 행 제일 빠른 거로요."
직원분이 말하길,
"네, 375달러입니다."
"네, 주세요."
신용카드를 드렸고,
"손님, 면허증도 주시겠어요?"
"네, 제 면허증이..."
"내 면허증 어딨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그때 든 생각이,
"아, 2번 터미널!"
그래서 짐을 챙겨 또 뛰기 시작했어요.
도착했더니 직원분께서
챙겨 놓으셨더라고요.
면허증을 챙겨서 다시 뛰었습니다.
이번엔 줄이 엄청나게 길어져 있었고
이 줄을 다 기다리면
비행기 타는 건 불가능해 보였죠.
하지만 전 그날 꼭
시카고를 가야 했어요.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저쪽에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직원이 보였습니다.
그분께 뛰어갔죠.
(숨을 몰아쉰다)
"바로 다음 비행기로
시카고에 가야 해요.
오늘 저녁에 당장 결혼할지도
모르는 여자를 만나야 하거든요.
(웃음소리)
사랑의 이름으로 절 좀 도와주세요."
(웃음소리)
그 직원분이 말하길,
"자주 듣는 얘기는 아니네요."
(웃음소리)
그리고 제 불운은
빠르게 행운으로 바뀝니다.
표를 출력해 주셔서
줄을 설 필요가 없었고
이제 갈 일만 남았죠.
'드디어 시카고로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대자연마저 방해하더군요.
폭풍이었습니다.
또다시 지연되었어요.
가는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리바에게 문자 했고
7시간 후에 도착했습니다.
7시간이나 걸려 시카고에 도착했고
아리바가 청혼을
받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늦어 버렸으니 모든 게 끝이었죠.
하지만 분위기가 좋았어요.
제가 온 것만으로도
아리바는 기뻐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저를 만나고 싶었답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보였고
저는 첫눈에
깊이 반해버렸고
감사함을 느꼈으며
사전을 찾아보면 나오는
사랑의 정의를 느꼈습니다.
저도, 아리바도 느꼈고
제 기대는 마구 솟구쳤죠.
그날 저녁, 더 많은 대화를 나눴고
서로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저의 누나와 어머니도 함께했고
아리바의 어머니도 계셨어요.
다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웃음)
아리바와 저는 산책하러 나갔고
우리 둘만의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웃음소리)
그날의 만남이 끝나갈 무렵,
저에게 여기에 앉으라 하셨고
아리바는 제 앞에,
어머니는 여기, 아리바의 어머니는
그 앞에 앉으셨어요.
어머니께서 아리바에게 물으시길,
"오마르가 결혼할 만큼 마음에 드니?"
(웃음)
그녀가 '네'라고 했어요.
아리바의 어머니께도 물으셨어요.
"오마르가 아들이 되도 될 만큼
마음에 드시나요?"
'네'라고 대답하셨죠.
이제 아리바 어머니의 차례입니다.
저희 어머니에게 물으시길,
"아리바가 딸이 되도 될 만큼
마음에 드시나요?"
어머니는 '네'라고 대답하셨고
저에게도, "아리바가 결혼할..."
"네!"
(웃음소리)
이번엔 두 어머니께서 동시에,
"오마르와 아리바, 너희들..."
"네!"
저희 둘 다 끄덕였어요.
그 토요일 밤, 집에 왔을 때
그녀가 제 운명이라는 걸 알았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어머니와 누나를 모시고
나가서 반지를 샀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아리바를
다시 만나기로 했고
그녀를 만났을 때,
저는 청혼 했습니다.
처음 만나고 바로 다음 날이였죠.
우린 일 년 후에 결혼하기로 했고
올 7월에 결혼했습니다.
바로 몇 달 전이었어요.
(방청객) 오!
(방청객) 와!
(박수)
결혼식 후에 신혼여행은 11일 동안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가서
로맨틱한 휴가를 만끽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중매 결혼을 통해
꿈에 그리던 여성과의
사랑을 찾았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현명함을 믿었습니다.
중매 결혼은 오랫동안 행해져 왔고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양한 문명과 시대를 거쳤습니다.
시카고트리뷴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찾았습니다.
"놀랍게도 새로운 변화가 보여주듯
미국에서 이제 중매 결혼은
사랑, 만족, 그리고
헌신의 결과를 낳는다."
중매 결혼은 강제 결혼이 아닙니다.
중매 결혼은 누군가를 만날 기회입니다.
주선된 만남인 거죠.
제가 중매 결혼을 통해
사랑을 찾은 것처럼,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