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VTT 00:00:13.857 --> 00:00:24.590 삶,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00:00:24.600 --> 00:00:27.805 우리는 행복을 “저 바깥”에서 추구하며 살고 있다. 00:00:27.815 --> 00:00:30.180 마치 행복이 일용품인 것처럼. 00:00:30.190 --> 00:00:38.907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갈망의 노예가 되었다. 00:00:38.917 --> 00:00:44.387 행복은 싸구려 양복처럼 구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00:00:44.397 --> 00:00:51.394 이것이 마야, 환상, 형상의 끊임없는 놀이이다. 00:00:51.404 --> 00:00:56.465 불교 전통에서, 삼사라, 또는 고통의 끝없는 사이클은 00:00:56.475 --> 00:01:02.912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면서 영원히 지속된다. 00:01:02.922 --> 00:01:06.928 프로이드는 이것을 “쾌락의 원리”라고 했다. 00:01:06.938 --> 00:01:10.015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쾌락을 만들고 00:01:10.025 --> 00:01:19.430 우리가 원치 않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밀어내는 것이다. 00:01:19.440 --> 00:01:23.421 짚신벌레 같은 단세포 생물조차도 이렇게 한다. 00:01:23.431 --> 00:01:26.229 그것을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부른다. 00:01:26.239 --> 00:01:30.724 짚신벌레와 달리 인간은 더 많은 선택이 있다. 00:01:30.734 --> 00:01:32.676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한다. 00:01:32.686 --> 00:01:34.788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00:01:34.798 --> 00:02:09.727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00:02:09.737 --> 00:02:13.974 현대 사회의 딜레마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00:02:13.984 --> 00:02:17.350 내면 의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00:02:17.360 --> 00:02:21.589 과학적 수단과 생각을 이용함으로써 외부세계로 인식하는 것을 00:02:21.599 --> 00:02:25.421 수량화하고 한정한다는 점이다. 00:02:25.431 --> 00:02:30.148 생각은 더 많은 생각과 더 많은 질문으로 이끌 뿐이다. 00:02:30.158 --> 00:02:35.500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가장 내면에 있는 힘을 알려고 한다. 00:02:35.510 --> 00:02:41.653 그런데 이 본질을 우리 자신의 본성에 내재된 것,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00:02:41.663 --> 00:02:44.386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00:02:44.396 --> 00:02:48.698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00:02:48.708 --> 00:02:55.809 “밖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00:02:55.819 --> 00:03:00.296 깨어있고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00:03:00.306 --> 00:03:26.063 잘못된 것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행복을 밖에서 찾는 것이다. 00:03:26.073 --> 00:03:34.494 제4부 생각을 넘어서 00:03:34.504 --> 00:03:40.182 2010년 8월 4일, 캘리포니아 레이크 타호의 테코노미 협의회에서 00:03:40.192 --> 00:03:45.461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는 놀라운 통계를 발표했다. 00:03:45.471 --> 00:03:54.435 매 이틀 동안 우리는 문명의 시작부터 2003년까지 만들었던 것 만큼의 정보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00:03:54.445 --> 00:04:01.739 그것은 5 엑사바이트 분량의 데이터와 같다. 00:04:01.749 --> 00:04:05.458 인류역사상 그렇게 많은 생각이 있었던 적이 없었고 00:04:05.468 --> 00:04:10.905 이 지구상에 그렇게 많은 혼란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00:04:10.915 --> 00:04:15.121 우리가 어떤 문제 하나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할 때마다 00:04:15.131 --> 00:04:18.384 또 다른 두 개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00:04:18.394 --> 00:04:21.248 이 모든 생각이 만일 더 큰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00:04:21.257 --> 00:04:23.783 그것의 좋은 점이 무엇인가? 00:04:23.793 --> 00:04:25.248 우리는 더 행복한가? 00:04:25.258 --> 00:04:26.823 더 평온한가? 00:04:26.833 --> 00:04:30.415 이 모든 생각의 결과로 더 즐거운가? 00:04:30.425 --> 00:04:35.134 아니면 그것이 더 깊고 더 의미 있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00:04:35.144 --> 00:04:42.549 우리를 고립시키고 떼어놓고 있는 것인가? 00:04:42.559 --> 00:04:48.356 생각과 행동은 존재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00:04:48.366 --> 00:05:04.250 결국 우리는 '인간 존재'이지 '인간 행동'이 아니다. 00:05:04.260 --> 00:05:09.393 우리는 변화를 원하면서 동시에 안정을 원한다. 00:05:09.403 --> 00:05:17.408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안정과 안전과 감각의 평정으로 몰아가면서 00:05:17.418 --> 00:05:25.263 우리의 심장은 생명의 나선형, 변화의 법칙으로부터 단절되었다. 00:05:25.273 --> 00:05:33.958 우리는 살인과 쓰나미와 지진과 전쟁을 병적으로 열광하며 지켜보고 있다. 00:05:33.968 --> 00:05:38.430 우리는 계속 우리 마음을 정보로 채우려 한다. 00:05:38.440 --> 00:05:41.669 TV는 모든 상상 가능한 장치로부터 나오는 영상을 보여준다. 00:05:41.679 --> 00:05:43.461 게임과 퍼즐. 00:05:43.471 --> 00:05:44.853 텍스트 메시지. 00:05:44.863 --> 00:05:47.700 그리고 모든 있을 수 있는 사소한 것들. 00:05:47.710 --> 00:05:51.364 우리는 감각을 애태우게 하고 갈증을 채우기 위해 00:05:51.374 --> 00:05:54.411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정보, 새로운 방법들의 00:05:54.421 --> 00:06:00.506 끊임없는 흐름에 최면이 걸리게 되었다. 00:06:00.516 --> 00:06:04.610 조용히 내면을 돌아볼 때, 우리의 가슴은 우리에게 00:06:04.620 --> 00:06:08.137 삶에는 현재의 실재 이상이 있다고 00:06:08.147 --> 00:06:12.113 우리가 지금 굶주린 유령의 세상에, 00:06:12.123 --> 00:06:24.487 끝없는 갈망과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00:06:24.497 --> 00:06:28.950 우리는 세상을 고치고, 마음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존재하는 문제를 고치기 위한 00:06:28.960 --> 00:06:34.558 더 많은 아이디어와 더 많은 생각을 가능케 하기 위해 00:06:34.568 --> 00:06:38.693 지구 주위를 돌면서 데이터의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00:06:38.703 --> 00:06:45.756 생각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큰 혼란 모두를 만들어냈다. 00:06:45.766 --> 00:06:50.388 우리는 질병과 적과 문제와 맞서는 전쟁을 한다. 00:06:50.398 --> 00:06:54.891 역설은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무엇이나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00:06:54.901 --> 00:06:58.907 우리가 어떤 것을 저항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강해진다. 00:06:58.917 --> 00:07:05.474 근육운동을 하는 것처럼, 당신은 실제로 제거하고 싶은 바로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00:07:05.484 --> 00:07:09.545 그렇다면, 생각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00:07:09.555 --> 00:07:32.512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기재가 무엇인가? 00:07:32.522 --> 00:07:39.512 현대의 서양 문명이 생각과 분석을 이용해 물리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반면에 00:07:39.522 --> 00:07:48.422 고대의 문명은 내면의 공간을 팀구하는 데에 똑같이 복잡한 기술을 개발했다. 00:07:48.432 --> 00:07:55.958 우리 지구에 불균형을 가져온 것은 우리 내면과의 연결 상실이다. 00:07:55.968 --> 00:08:04.276 “너 자신을 알라.”는 옛 경구는 형태의 외적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00:08:04.286 --> 00:08:06.804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00:08:06.814 --> 00:08:15.547 당신의 명함에 무엇이 적혀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00:08:15.557 --> 00:08:19.746 불교에서 당신은 당신 의식의 내용물이 아니다. 00:08:19.756 --> 00:08:23.290 당신은 단지 생각과 아이디어의 집합체만이 아니다. 00:08:23.300 --> 00:08:35.560 그 생각 배후에는 그 생각을 주시하고 있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00:08:35.570 --> 00:08:40.848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선의 공안, 대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00:08:40.857 --> 00:08:45.223 결국 마음은 대답을 찾으려다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00:08:45.233 --> 00:08:56.670 꼬리를 물려는 개처럼, 대답, 목적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에고일 뿐이다. 00:08:56.680 --> 00:09:00.797 당신이 누구인가의 진실은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00:09:00.807 --> 00:09:08.101 왜냐하면 모든 질문은 이기적인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00:09:08.111 --> 00:09:16.267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아니다. 00:09:16.277 --> 00:09:18.834 진실은 더 많은 대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00:09:18.844 --> 00:09:24.834 더 적은 질문에 있다. 00:09:24.844 --> 00:09:27.241 조셉 캠벨이 말한 것처럼, 00:09:27.251 --> 00:09:52.830 “나는 사람들이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00:09:52.840 --> 00:09:56.965 “당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00:09:56.975 --> 00:09:59.229 “나는 깨어있다.” 00:09:59.239 --> 00:10:07.460 깨어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00:10:07.470 --> 00:10:09.620 붓다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00:10:09.630 --> 00:10:13.244 각 개인의 삶이 피우는 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00:10:13.254 --> 00:10:15.571 하지만 그는 이렇게 한 가지는 말한다. 00:10:15.581 --> 00:10:21.738 그것은 고통의 끝이라고. 00:10:21.748 --> 00:10:26.314 모든 주요한 종교 전통은 깨어있는 상태에 대한 이름이 있다. 00:10:26.324 --> 00:10:27.337 천국. 00:10:27.347 --> 00:10:28.513 열반. 00:10:28.523 --> 00:10:32.416 또는 모크샤. 00:10:32.426 --> 00:10:37.384 고요한 마음이 당신이 깨달아야 할 모든 것, 흘러가는 것의 본질이다. 00:10:37.394 --> 00:10:40.591 일단 당신의 마음이 고요해지면 모든 다른 것들이 일어날 것이다. 00:10:40.601 --> 00:10:43.766 그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가 깨어나 00:10:43.776 --> 00:10:48.190 당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한다. 00:10:48.200 --> 00:10:56.125 도교에서 말하듯이, "기는 의식을 따라 흐른다.” 00:10:56.135 --> 00:11:01.204 고요해짐으로써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지혜를 듣기 시작한다. 00:11:01.214 --> 00:11:05.363 고요함은 꿈속에서 속삭인다. 00:11:05.373 --> 00:11:11.499 그리고 사람은 그 꿈들이 물질적 형태로 나타나는 미묘한 기재를 배운다. 00:11:11.509 --> 00:11:17.386 도덕경에서 이런 삶을 “위무위”라고 한다. 00:11:17.396 --> 00:11:22.569 하지만 하지 않는 것. 00:11:22.579 --> 00:11:28.000 붓다는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로 “중도”를 말했다. 00:11:28.010 --> 00:11:33.080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움의 길로서 "중용" 00:11:33.090 --> 00:11:36.199 - 양극 사이의 중간을 말했다. 00:11:36.209 --> 00:11:39.655 너무 많은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적은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닌 것. 00:11:39.665 --> 00:11:57.260 음과 양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 00:11:57.270 --> 00:12:00.212 마야 또는 환상에 대한 베단타의 개념은 00:12:00.222 --> 00:12:03.572 우리가 환경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00:12:03.582 --> 00:12:08.107 생각으로 만들어진 투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00:12:08.117 --> 00:12:13.194 물론 당신의 생각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진동하는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 00:12:13.204 --> 00:12:21.761 하지만 우리 내면의 평정은 외부적인 사건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00:12:21.771 --> 00:12:30.184 인식하는 주체와 독립되어 외부세계를 믿는 것이 과학의 근본이다. 00:12:30.194 --> 00:12:33.952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간접 정보만을 준다. 00:12:33.962 --> 00:12:37.727 마음이 만들어낸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00:12:37.737 --> 00:12:43.934 항상 감각을 통해 걸러지며 따라서 항상 불완전하다. 00:12:43.944 --> 00:12:48.814 모든 감각의 밑에 깔린 하나의 진동장이 있다. 00:12:48.824 --> 00:12:56.909 공감각이라고 불리는 조건 하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이 진동하는 장을 다른 식으로 경험한다. 00:12:56.919 --> 00:13:00.557 공감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색깔이나 형태로 보거나 00:13:00.567 --> 00:13:05.131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과 연관시킬 수 있다. 00:13:05.141 --> 00:13:13.026 공감각이란 감각의 통합, 또는 감각의 얽힘을 말한다. 00:13:13.036 --> 00:13:19.641 차크라와 감각은 진동의 연속체를 걸러내는 프리즘과 같다. 00:13:19.651 --> 00:13:27.664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진동하고 있지만 비율과 진동수는 서로 다르다. 00:13:27.674 --> 00:13:31.288 호루스의 눈은 여섯 가지 상징으로 되어있는데 00:13:31.298 --> 00:13:34.263 그것은 각각의 감각을 나타낸다. 00:13:34.273 --> 00:13:44.095 고대의 베다 체계처럼, 생각은 감각으로 여겨진다. 00:13:44.105 --> 00:13:49.173 생각은 감각이 몸에서 경험될 때 동시에 들어온다. 00:13:49.183 --> 00:13:53.949 생각은 똑같은 진동의 근원에서 일어난다. 00:13:53.959 --> 00:13:56.148 생각은 단지 하나의 도구이다. 00:13:56.158 --> 00:13:58.460 여섯 가지 감각 중의 하나이다. 00:13:58.470 --> 00:14:01.644 하지만 우리는 생각을 너무 높은 지위로 올려놓아 00:14:01.654 --> 00:14:06.875 우리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하고 있다. 00:14:06.885 --> 00:14:12.602 우리가 생각을 여섯 가지 감각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가 깊다. 00:14:12.612 --> 00:14:14.802 우리는 생각에 너무 몰입되어 있어 00:14:14.812 --> 00:14:20.793 생각을 하나의 감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00:14:20.803 --> 00:14:31.680 물, 어떤 물? 00:14:31.690 --> 00:14:34.391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00:14:34.401 --> 00:14:37.487 눈으로 볼 수 없으나 00:14:37.497 --> 00:14:41.119 그로 인해 눈이 볼 수 있으니 00:14:41.129 --> 00:14:43.582 그것이 브라마, 영원임을 알라. 00:14:43.592 --> 00:14:47.342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 브라마가 아니다. 00:14:47.352 --> 00:14:50.309 귀로 들을 수 없으나, 00:14:50.319 --> 00:14:53.853 그로 인해 귀가 들을 수 있으니 00:14:53.863 --> 00:14:56.509 그것이 브라마, 영원임을 알라. 00:14:56.519 --> 00:15:02.716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 브라마가 아니다. 00:15:02.726 --> 00:15:05.491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00:15:05.501 --> 00:15:09.099 그로 인해 말이 표현될 수 있으니 00:15:09.109 --> 00:15:11.970 그것이 브라마, 영원임을 알라. 00:15:11.980 --> 00:15:22.433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 브라마가 아니다. 00:15:22.443 --> 00:15:25.249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으나, 00:15:25.259 --> 00:15:28.680 그로 인해 마음이 생각할 수 있으니 00:15:28.690 --> 00:15:31.184 그것이 브라마, 영원임을 알라. 00:15:31.194 --> 00:16:04.324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 브라마가 아니다. 00:16:04.334 --> 00:16:10.163 최근 몇 십 년 동안 뇌 연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00:16:10.173 --> 00:16:13.186 과학자들은 신경가소성을 발견했다. 00:16:13.196 --> 00:16:21.073 뇌의 물리적인 선은 그것을 통해서 움직이는 생각에 따라서 변한다는 개념이다. 00:16:21.083 --> 00:16:23.937 캐나다 심리학자 도날드 헤브는 이렇게 말했다. 00:16:23.947 --> 00:16:34.879 “함께 점화된 뉴런은 함께 선을 배치한다.” 00:16:34.889 --> 00:16:40.750 뉴런은 사람이 지속적인 집중 상태에 있을 때 대부분 함께 선을 배치한다. 00:16:40.760 --> 00:16:46.206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당신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지휘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00:16:46.216 --> 00:16:52.205 만일 당신의 생각이 두려움, 걱정, 불안, 부정성에 대한 것이라면, 00:16:52.215 --> 00:16:56.245 당신은 그런 생각이 더 늘어나도록 선을 배치한다. 00:16:56.255 --> 00:17:01.564 만일 당신의 생각이 사랑, 자비, 감사와 즐거움에 대한 것이라면, 00:17:01.574 --> 00:17:05.435 당신은 그런 경험을 반복하는 선을 배치한다. 00:17:05.444 --> 00:17:09.650 하지만 우리가 폭력과 고통에 둘러 싸여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하겠는가? 00:17:09.661 --> 00:17:14.778 이것은 일종의 망상, 또는 소원을 비는 생각이 아닌가? 00:17:14.788 --> 00:17:22.489 신경가소성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실재를 창조하는 뉴에이지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00:17:22.499 --> 00:17:30.256 그것은 실제로 붓다가 2,500년 전에 가르쳤던 것과 같은 것이다. 00:17:30.266 --> 00:17:39.143 비파사나 명상, 또는 통찰 명상은 스스로 유도하는 신경가소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00:17:39.153 --> 00:17:46.894 당신은 당신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그것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00:17:46.904 --> 00:17:50.605 하지만 그것을 감각의 뿌리 차원에서 경험한다. 00:17:50.615 --> 00:17:56.597 편견이나 생각의 영향 없이 진동과 에너지적인 차원에서. 00:17:56.607 --> 00:18:18.354 의식의 뿌리 차원에서 지속적인 주의를 통해 실재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인식의 선이 배치된다. 00:18:18.364 --> 00:18:21.217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을 거꾸로 해왔다. 00:18:21.227 --> 00:18:27.528 우리는 계속 외부세계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신경망을 형성하도록 했다. 00:18:27.538 --> 00:18:34.560 하지만 우리 내면의 평정은 외부의 사건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00:18:34.570 --> 00:18:37.519 주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00:18:37.529 --> 00:18:41.407 오직 나의 의식 상태만이 중요하다. 00:18:41.417 --> 00:18:44.838 산스크리트어에서 명상은 이리저리 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00:18:44.848 --> 00:18:47.094 모든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00:18:47.104 --> 00:18:50.157 어떤 것이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00:18:50.167 --> 00:18:52.373 당신은 어떤 다른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00:18:52.383 --> 00:18:57.172 당신은 있는 그대로 괜찮다. 00:18:57.182 --> 00:19:02.900 물리적인 영역의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은 그것을 완전히 품어 안는 것, 00:19:02.910 --> 00:19:05.140 모든 것에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00:19:05.150 --> 00:19:07.851 그래서 그 안에서 당신이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00:19:07.861 --> 00:19:20.985 당신 안에서 무엇이 되는 것이다. 00:19:20.995 --> 00:19:27.264 어떻게 의식이 그 내용물과 더 이상 충돌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00:19:27.274 --> 00:19:32.088 어떻게 가슴에서 사소한 야망을 비울 수 있는가? 00:19:32.098 --> 00:19:35.399 의식에 완전한 혁명이 있어야 한다. 00:19:35.409 --> 00:19:41.359 바깥 세상에 대한 지향으로부터 내면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 00:19:41.369 --> 00:19:45.654 그것은 의지나 노력만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다. 00:19:45.664 --> 00:19:48.181 놓아버림으로 하는, 00:19:48.191 --> 00:20:01.052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00:20:01.062 --> 00:20:08.283 그리스도의 열린 가슴 이미지는 모든 고통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강력하게 전달한다. 00:20:08.293 --> 00:20:14.650 진화하는 근원에 열려 있으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00:20:14.660 --> 00:20:17.202 매조키스트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00:20:17.212 --> 00:20:19.241 고통을 바라보지 말고 00:20:19.251 --> 00:20:23.417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올 때, 00:20:23.427 --> 00:20:26.617 어떤 다른 실재를 갈망하는 대신에 00:20:26.627 --> 00:20:32.184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00:20:32.194 --> 00:20:37.664 하와이 사람들은 가슴을 통해서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믿어왔다. 00:20:37.674 --> 00:20:44.358 가슴은 뇌가 그러는 것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지성을 갖고 있다. 00:20:44.368 --> 00:20:49.989 이집트인들은 뇌가 아니라 가슴이 지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00:20:49.999 --> 00:20:54.621 가슴이 영혼과 인격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00:20:54.631 --> 00:21:00.740 신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가슴을 통해 00:21:00.750 --> 00:21:05.371 진정한 길을 알려 주었다. 00:21:05.381 --> 00:21:08.963 이 파피루스는 가슴의 무게를 다는 것을 묘사한다. 00:21:08.973 --> 00:21:13.354 가벼운 가슴으로 다음 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00:21:13.364 --> 00:21:21.354 그것은 당신이 잘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00:21:21.364 --> 00:21:44.318 사람들이 가슴 센터를 각성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단계는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의 에너지로 경험하는 것이다. 00:21:44.328 --> 00:21:49.414 당신이 이 사랑을 느끼고 이 사랑이 될 때, 00:21:49.424 --> 00:21:53.349 당신의 내면세계를 외면세계와 연결할 때, 00:21:53.359 --> 00:21:56.420 그때 모든 것은 하나다. 00:21:56.430 --> 00:22:00.636 어떻게 우주의 음악을 경험하는가? 00:22:00.646 --> 00:22:06.939 어떻게 가슴이 열리는가? 00:22:06.949 --> 00:22:09.371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했다. 00:22:09.381 --> 00:22:12.346 “신은 당신 안에, 당신으로 거주한다. 00:22:12.356 --> 00:22:17.282 신을 깨닫거나 자아를 깨닫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00:22:17.292 --> 00:22:20.729 그것이 이미 당신의 진정한, 본래의 상태이다. 00:22:20.739 --> 00:22:22.953 찾으려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00:22:22.963 --> 00:22:25.009 주의를 안으로 돌려라. 00:22:25.019 --> 00:22:31.096 그리고 당신 존재의 가슴을 밝히면서 마음을 하나의 자아에 쏟아부어라. 00:22:31.106 --> 00:22:34.767 이것을 당신의 현재 살고 있는 경험으로 만들기 위 00:22:34.777 --> 00:22:48.318 한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은 자아를 탐구하는 것이다." 00:22:48.328 --> 00:22:53.781 내면의 감각과 내면의 살아있음을 명상하고 관찰할 때, 00:22:53.791 --> 00:22:57.844 당신은 사실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00:22:57.854 --> 00:23:04.563 이 변화의 힘은 에너지가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일어나고 지나가는 것이다. 00:23:04.573 --> 00:23:08.291 어떤 사람이 진화하고 깨달음을 얻는 정도는 00:23:08.301 --> 00:23:13.258 각각의 순간에 적응하는 능력을 얻는 정도, 00:23:13.268 --> 00:23:28.752 또는 계속 변화하는 환경과 고통과 즐거움의 흐름을 환희로 변환시키는 정도이다. 00:23:28.762 --> 00:23:33.376 “전쟁과 평화”의 저자 레오 톨스토이는 말했다. 00:23:33.386 --> 00:23:36.247 “모든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각을 한다. 00:23:36.257 --> 00:23:45.958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00:23:45.968 --> 00:24:08.427 다윈은 종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특성은 힘이나 지성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라고 말했다. 00:24:08.437 --> 00:24:11.483 사람은 적응에 능숙해져야 한다. 00:24:11.493 --> 00:24:14.842 이것은 “아니짜”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00:24:14.852 --> 00:24:19.610 -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한다. (제행무상) 00:24:19.620 --> 00:24:21.409 끊임없이 변한다. 00:24:21.419 --> 00:24:31.568 고통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형태에 집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00:24:31.578 --> 00:25:24.089 당신 자신의 주시하는 부분과 연결될 때, 아니짜에 대한 이해와 함께 환희가 가슴 속에서 일어난다. 00:25:24.099 --> 00:25:30.872 역사를 통해서 성인, 현자, 요기들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합일을 한 목소리로 말한다. 00:25:30.882 --> 00:25:39.543 십자가 성 요한의 글이든, 루미의 시든, 인도 탄트라의 가르침이든, 00:25:39.553 --> 00:25:46.950 이 모든 서로 다른 가르침들이 가슴의 미묘한 신비를 표현하려고 한다. 00:25:46.960 --> 00:25:50.565 가슴 속에 시바와 샤크티의 합일이 있다. 00:25:50.575 --> 00:25:54.333 생명의 나선으로 들어가려는 남성의 통찰과 00:25:54.343 --> 00:25:58.564 여성의 변화에 대한 포기, 00:25:58.574 --> 00:26:06.531 주시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받아들임. 00:26:06.541 --> 00:26:11.331 가슴을 열기 위해서는 변화에 자신을 열어야 한다. 00:26:11.341 --> 00:26:14.194 단단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00:26:14.204 --> 00:26:15.498 그것과 함께 춤을 춰라. 00:26:15.508 --> 00:26:16.914 그것과 함께 엮여라. 00:26:16.924 --> 00:26:18.354 충분히 살아라. 00:26:18.364 --> 00:26:20.266 충분히 사랑하라. 00:26:20.276 --> 00:26:22.993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00:26:23.003 --> 00:26:29.656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는 흩어지고 변한다는 것을 알아라. 00:26:29.666 --> 00:26:33.480 환희는 고요함에 반응하는 에너지이다. 00:26:33.490 --> 00:26:37.391 그것은 의식의 내용물을 모두 비우는 데에서 온다. 00:26:37.401 --> 00:26:42.638 고요에서 태어난 이 환희 에너지의 내용물은 의식이다. 00:26:42.648 --> 00:26:45.224 가슴의 새로운 의식. 00:26:45.234 --> 00:28:06.911 존재하는 모든 것에 연결된 의식. 00:28:06.921 --> 00:28:15.778 당신은 결코 존재하는 실재와 투쟁함으로써 사물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00:28:15.788 --> 00:28:24.478 뭔가를 변화시키려면 현존하는 모델을 구식으로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라. - 버크민스터 풀러 00:28:24.488 --> 00:28:29.488